제9회 아산지역사회교육상 수상자 김인자 소장 인터뷰

제9회 아산지역사회교육상 수상자 김인자 소장 인터뷰
▲ 제9회 아산지역사회교육상 수상자 김인자 소장 인터뷰 사진.

 

“남에게 잘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잘하는 것이다”

 

지난 12월 9일 양평동 재단 커뮤니티홀에서 한국지역사회교육재단 주최 <제9회 아산지역사회교육상 시상식>이 있었다. 이 시상식에 앞서 11월 29일현장단체 회장인 이종의 지역사회교육실천본부 회장이 수상자이신 김인자 소장을 인터뷰하였다. < 편집자 주>

 

이 : 한국지역사회교육재단에서는 이번 아산지역사회교육상 수상자로 김인자 한국심리상담연구소 소장님을 결정하였습니다. 지역사회교육운동의 주춧돌을 놓으시고 심적, 재정적 도움을 주신 故 정주영 회장님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이 시상은 2006년도에 시작하여 2013년까지 8회기에 걸쳐서 매 년 이어져 왔습니다.  2014년 이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잠시 시상식이 중단되었다가 올 해 2021년 다시 재개가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개최되는 아산지역사회교육상의 포문을 여는 수상자로 김인자 소장님께서 상을 받게 되시는 것은 여러 가지로 뜻이 깊은 거 같습니다. 인터뷰를 맡게 된 저는 1998년 이 단체에 발을 들여서 부모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또한 현재 지역사회교육실천본부 회장직을 맡고 있는 이종의입니다. 김인자 소장님 우선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아산지역사회교육상 수상자로 선정되셨는데 소감이 어떠신지요?

 

  故 정주영 회장이 발로 뛰며 참여하신 이 일에 함께 한 50년
김: 처음에는 좀 민망하기도 하고 내가 이런 상을 받을 자격이 되나?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돌이켜보니 이 운동이 시작할 때부터 정주영 회장님하고 50여 년 동안 진짜 무료 봉사를 한 것이었죠. 다른 많은 기업가들이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가 생기면 재단도 만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지요. 그렇지만 정주영 회장님은 그냥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모든 활동에 참여를 하셔서 지역사회교육운동을 시작하겠다는 데가 있으면 방방곡곡 어디라도 직접 참여하셨습니다. 그래서 꼭 인사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원고도 없이 그냥 뭐 술술술술.. ‘지역사회교육운동은 가장 작은 단위의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초등학교를 거점으로 지역민 모두를 위한 배움터가 되어야 한다는 거, 함께 사는 이웃하고 더불어 성장을 해야 한다’는 그런 말씀이 나한테 아주 깊은 감동으로 전달이 되었어요. 그 시절에 벌써 평생교육, 평생학습을 생각하셨던 거죠.
그러한 그 분의 신념에 굉장한 감동을 받아서 ‘아, 좋은 일 하시는데 그렇다면 내가 힘닿는데 까지 도와드려야지!’ 그냥 그런 생각으로 열심히 50여 년 동안 그저 참여를 한 건데, 정말 현장에서 열심히 실천하신 분들도 많으신데 이 상을 내가 받아도 되나하는 생각에 많이 무안했어요.
이 : 지금 말씀을 듣고 보니 마땅히 수상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故 정주영회장님께서도 지극히 마땅하다 하시며 기뻐하실 것 같아요. 정 회장님께서 경제적 후원을 해주시고 이렇게 학계에 계시는 김인자 교수님 같은 분이 서포트를 해주셔서 저희 단체가 이 운동을 뿌리내리고 지금까지 계속 지탱해 올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알기로는 소장님께서는 1950년대에 벌써 미국에서 유학을 하셨잖아요. 그 당시에는 전쟁 시기였고 유학이라는 것이 쉽지 않았을 시절인데 어떻게 미국유학을 하시게 되었는지요?

 

어린시절 동생과 함께.

 

이 질문에 대하여 김인자 소장님의 파란만장한 생존기를 듣게 되었다.
그 당시 대부분에 사람들이 그러하였듯이 피난으로 대구에 머물게 되었을 때 생존을 위하여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다. 이발소에서 타월도 빨아주고, 식당에 들어가 식탁 닦고 정리하고 돈 좀 받고, 어떻게 하면 돈을 좀 더 받을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어디라도 가서 일을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전쟁직후여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서로 도우며 잘 살 수 있을까’하는 마음에 도와주어서 좋았고 또 조금의 사례비를 받아서 금상첨화였다.
그러던 중에 병원에서 일을 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타이프라이터가 취직에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학원에 가서 배울 돈이 없어 타이프라이터 키의 위치만 알아내서 이를 도화지에 그려 이불 위에 놓고 매일매일 연습을 하였다. 때마침 병원에 타이피스트 자리가 하나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실력으로 취직을 하게 된 것이다. 타이피스트로 취직은 했으나 타이핑도 잘 못하고 더구나 영어 보고서를 타이핑해야하는 데 실력이 안되니 다른 직원들이 퇴근한 후에 혼자 남아서 타이핑 연습도 하고 보고서 만드는 것도 다른 선배들이 만들다가 버린 것을 주워서 보면서 흉내를 내고 하면서 자신을 유능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하였다. 영어는 문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격언 등을 적어서 무조건 들고 다니면서 외웠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유학의 기회까지 연결돼 …
김 : 어느 토요일 오후 그 날도 혼자 남아서 타이핑 연습을 하고 있는데, 어떤 의사가 와서 굉장히 급한데 좀 도와주면 좋겠다고 해요. 너무 간절히 요청을 하여서 sure하면서 무조건 따라갔어요. 철문을 열고 수술실로 들어가는데 나보고 신체해부를 도와달라는 거예요. 무서워서 도망치려하다가 순간 할머님의 말씀이 생각났어요.

 

“남에게 잘하는 것이 자기에게 잘하는 거예요”

 

오죽하면 나 같은 사람한테 도움을 요청을 할까 싶어서 벌벌벌 떨면서 시키는 대로 했어요. 신체부위를 의학용어로 부르면 틀리는 스펠링으로 기록을 하고, 수술 후 의사가 보고서를 쓴 것을 밤늦게까지 타이핑해서 드렸더니 그 분이 너무 고마워하시는 거죠. 그리고 제가 가톨릭 신자여서 매일 미사에 참여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요일 출퇴근 시간 상관없이 언제든지 도움을 주고 그랬더니 그것이 소문이 나서 그 당시 미 8군 사령관으로 있었던 막스 디테일러 장군에게 내 얘기가 전달이 되었나 봐요. 어느 날 그 장군이 나를 보자고 하셔서 미 8군 본부까지 갔어요. 그랬더니 거기에서 제너럴 막스 디테일러가 “니가 외국 유학을 가고 싶으면 내가 좀 도와줄 수 있다”고 하시는 거예요. 해서 그냥 무조건 외국 유학 가겠다고 그랬죠. 돈이 없으니까 옛날 선배 뭐 이런 분들한테 “나 어디서 장학금 좀 얻어 달라.”고 했어요. 그 선배 되시는 분이 YWCA에서 일하시던 분인데 어떻게 자기 아는 미국 학교에다 연락을 해서 장학금을 얻어주고, 장학금 받은 다음에 제너럴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그 분이 여비를 대주시고, 그리고 많은 군인들이 뭐 5불 10불 1불 이렇게 보태주어서, 미국 가서 일 년 동안은 장학금 받고 용돈은 그렇게 보태준 돈으로 쓰면서 아주 잘 학교를 다녔어요.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학교에 가자마자 국내에서의 내 병원 경력을 갖고 일자리를 찾았는데, 그 다음해 6월 초부터 일할 수 있는 병원 일자리가 나타난 거예요. 병원에서 일을 하다보니까 의사, 간호사는 아니지만 흰 의료복과 하얀 신발 하나만 있으면 돼서 별다른 옷이 없어도 되었던 거죠. 그리고  간호사 기숙사에 있었기 때문에 먹고 자는 게 걱정이 없었어요.

 


 

이 : 할머니 말씀이 근간이 되어서 그러한 행운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거네요. 그냥 남들이 듣기에는 행운의 성공 스토리로 들리지만,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그러한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되신 거잖아요. 이처럼 열심히 준비하시고 그 성실한 열정이 오늘 날 우리 소장님을 이 자리까지 이끌어주고 저희 운동에도 큰 밑거름이 되어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원봉사로 시골학교까지 강의
김 : 예, 굉장히 작은 거라도 그것을 정성을 들여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는 할머님의 가르침은 내 삶의 방법이랄까 철학으로 작용을 한 것 같아요.
내가 이 지역사회교육운동을 하는데도 그것을 늘 생각을 했기에, 정말 뭐 보수 같은 거 바라지 않고, 정회장님의 훌륭한 뜻을 받들어서 우리 지역사회가 발전하는 데에 내가 공헌할 수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가리라 하면서 지난 50여년을 무료 봉사를 한 것이죠.
교통도 굉장히 불편한 시절인데 시골 얼음길을 걸어서, 조그마한 교실에서 모여 있는 지역주민들을 만나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이 자리가 배움터이고 나눔터가 되어야 한다. 여러분들이 주역이다’ 하고 열변과 토론을 마치고, 몇 시간을 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에 도착하면 그 보람과 뿌듯함에 피곤도 몰랐어요. 그 당시 마음은 ‘한국이 금방 어떻게 변할 것 같다’는 부푼 마음이어서 정말 보람을 느꼈습니다.

 

1968년 고 정주영회장과 지역사회교육운동 발족준비를 하던 운영위원회

 

이 : 초창기에 활동에 참여하신 마음이나 실제 활동들은 저희가 그냥 밤을 새고 들어도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한없이 감사한 마음입니다.
서강대학교와의 인연, 심리학을 가르치게 된 동기에 대하여 여쭈어 보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서강대학교가 설립되던 1960년 당시부터 창립멤버로서 참여하셨는데 그 때 서강대학교에서 처음 가르치셨던 과목이 심리상담이셨나요?

 

서강대학교 개교 당시 참여 학생들이 원하는 과목개설
김 : 아니요, 난 당시에 심리상담은 알지도 못했어요. 나는 의사가 되려고 했고 내가 전공한 것은 생화학이었어요. 근데 서강대학교에서 학교를 개설하고 개교를 하면서 그때 당시가 오십년대 말쯤이어서 교수진을 찾고 있는데 여자 교수가 필요한데 영어 좀 하고 미국 교육을 아는 사람 누구 없을까 찾다보니까 누군가가 내 얘기를 했나 봐요. 그때 나는 의사가 되려고 생화학 공부를 가다가 연애에 빠져가지고 한국에 왔지만 의사 되는 것에 대해서는 포기하지 않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서강대가 개교를 하면서 와달라고 그러니까 나는 교수 될 생각도 자격도 없다고 극구 거절을 하는데도 포기를 않고 계속 와 달라고 조르는 거예요. 하여튼 셋방을 살고 있었는데 한 번은 지프차 타고 온 교수 한 분인 예수회 사제가 오다가 지프차가 그냥 수렁에 빠지고, 또 한 번은 필로렌 학장이 직접 꼭 좀 참여해 달라고 오셨는데 그 분 지갑을 동네 아이들이 훔쳐서 돈은 다 빼가고 그냥 지갑만 담 안에다 던져놨더라고요. 웬 지갑이 떨어져있어서 주워서 들여다보니까 아 그분 사진 있잖아요. 그래서 그걸 돌려주러 서강대로 갔어요. 그랬더니 또 같이 일하자고 막 그래서 아유 못한다고 그러고 그냥 와버렸거든요. 근데 그 후 이제 세 번째로 필로렌 학장이 우리 셋방에를 또 오신 거예요. 세상에 그 분이 키가 커서 구부리고 들어왔지만 방 안에 딱 서니까 그냥 천장을 뚫고 나갈 거 같애. 그냥 방바닥에 탁 앉더니 “같이 합시다.” 하면서 임용계약서를 방바닥에 놓고 가버렸었어. 아휴 그래서 이제 할 수 없이 계약을 하고는, 이제 그러면 참여를 하겠다 그러면 내가 생물학이나 뭐 그런 걸 가르치는 거냐고 하니까, 아니 현재 절대로 필요한 것이 바로 상담소이고 상담소를 계속 하려면 심리학이나 교육학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교수를 이 초창기에 모실 수가 없다. 학생 수도 백 몇십명 밖에 안 되는데 또 교수를 모실 수가 없으니까 니가 가르치라고 해서, 아 그건 나 잘 모른다고 그러니까 알아서 하라는 거라. 세상에 그 다음부터는 내가 더듬어서 그냥 이웃 학교에 가서 또 서울대학이고 어디고 이 서강대학 근처에 있는 이웃 대학에 가서 도와달라고, 헌데 잘 안 도와줘요. 그 당시에는 텍스트북도 없었어요.

 

1958년 서강대학교 창립 당시

그래서 어떤 공부를 하면 좋을까 학생들한테 물어봤어요. 너희들이 교육학과 심리학하고 관련된 거 더 좀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게 뭐냐 그랬더니, 어떡하면 이웃사람하고 부모하고 잘 지낼 수 있을까 말을 하려고 해도 소통이 안 되니까 소통하는 방법 좀 배우고 싶다. 그래서 자기표현과 인간관계.. 그리고 나를 진짜 당황스럽게 만드는 게 뭐냐 하면 죽음이 뭐요?  이러고 물어보는 거야,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심리적 이해 등, 이러한 과목을 전부 다 학생들이 원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과목을 개설하고, 헌데 한국에서는 참고할 책이 없어요. 그래서 미국으로 가서 대학에 가보니까 그런 과목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서 이제 책을 사가지고 한국에 와서 한쪽 한쪽 번역을 해가며.. 이미지는 타자로 칠 수도 없잖아. 이미지, 표 등은 타자로는 안 돼 그러니까 철판에다가 펜으로 긁고 등사를 해서 아이고 세상에 그러니까 학생들과 그 자료를 나눠 가지고 학생들을 내가 가르친 게 아니라 학생들하고 같이 공부했어요.  심리학 개론이라든가 무슨 그런 것 같은 거는 주변 대학의 유명한 교수들을 불러서 기본적인 이론은 그분들이 하고, 학생들이 원하는 거를 중심으로 개설한 과목을 내가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 같이 공부하자 이래 가면서 그런 공부를 했어요. 그랬더니 나중에는 오히려 다른 대학교에서 그런 과목이 있냐고 그러면 우리도 좀 가르쳐 달라고 했다니까. 특히 그 당시에는 죽음에 대해서는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이미 가르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그런 교육이 없었어요.

 

소통과 선택에 관한 세계적인 전문가들의 이론을 한국에 들어와

 

이 : 그러한 연유로 그 당시에 부모효율성훈련인 PET(Parent Effectiveness Training)와 행동선택이론인 RT(Reality Therapy) 등을 국내에 소개하신거로군요.
김 :  부모들하고 이렇게 소통이 안 된다고 그러기에 찾아보니까 토머스 고든이 50년대부터 개발해가지고 부모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든게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또 가만히 못 있지. 샌디에이고에까지 찾아가서 고든박사를 만나고, 부모하고 자녀하고 효율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인 PET를 그 분에게 직접 강사 훈련까지 받고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한 번 와 달라고 초청을 했죠.
그리고 사람들이 당장 당장에 마땅한 좋은 거를 위해서는 그냥 바로 선택할 수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뭐 선택이론이라는 걸 개발해놨다는 사람이 있어서 또 거기도 찾아갔지. 그래서 내가 그냥 먼저 강사 과정을 하고는 한국에 좀 와달라고 부탁해서 RT를 개발한 윌리암 글라써 박사도 1년 후에 오셨어요.
그래서 그런 분들이 소통하는 방법과 행동을 어떻게 바꾸게 할까를 연구하고 프로그램화한 것을 내가 여기 지역사회교육학교에서 시작을 하게 된 거지요.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강사과정을 열어서 강사를 배출하고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학부모 교육을 시작한 첫 프로그램이기도 합니다. 부모-자녀관계를 좋게 하는 부모교육훈련(PET)개발자인 토마스 고든은 노벨 평화상 후보로 네 번이나 올랐어요.

 

 

이 : 예. 바로 저도 이렇게 소장님께서 도입하신 공부들이 바탕이 돼서 98년도에 이 단체(한국지역사회교육재단)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지금까지 한 20여 년을 부모교육수석강사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소장님의 가장 큰 공로 중 하나가 저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서 가르다가 다시 교육의 현장으로 들어와서 공부하고 강의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부모교육의 첫 단추를 채워준 강사님들은 소장님이 배출한 제자들이었습니다.김 : 그랬군요. 제 연구소(한국심리상담소)에서 훈련받은 사람이 한 800여 명이 돼요. 그 강사들이 우리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해서 연구한 석박사 논문이 지난 2월에 국회 도서관에 확인해 보니까 1,633개가 되드라구요.
그리고 또 미국에 있는 국제 긍정심리학회는 내가 창립 멤버예요. 당시 미국심리학회 회장을 역임한 마틴 샐리그만 박사가 당시 미국심리학회가 전후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한 이상심리학에 온통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때인데 우울증 극복에는 오히려 긍정심리로 이끌어주는 것이 효과가 있다는 발표를 하면서 긍정심리학이 태동이 되었지요. 그 때 뜻을 함께 한 멤버 중 한 사람이 저 입니다. 그 후 셀리그만박사도 국내에 초대를 했어요, 연세대학교 강당에서 초대강연회를 가졌는데 아주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했습니다.

 

2006년 긍정심리학의 대가 마틴 셀리그만 박사 초청강연회

이 : 꼭 심리학적으로만이 아닌 인문학적 삶의 접근을 위해서도 실제적인 훈련이 되는, 당시에는 생소했을 많은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시고 삶의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초석을 다지셨네요, 지금 연세가 90이심에도 여전히 심리상담연구소를 중심으로 강의 활동도 하시고 상담도 하고 계신데 그러한 열정이 계속 유지되시는 비결이 무엇일까요?김 :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누가 뭐가 좋다고 그러면 시작을 안 하면 못 견뎌요. 뭐든지요.
좋은 거는 그냥 용기 있게. 그러니까 나이 90이 돼도 아직도 할 일이 많아요.

(연구소활동 브로셔와 캠페인용 카드, 최근에 강의하신 강의 자료집 등 많은 것을 가지고 오셔서 보여주셨다)

 현재 우리 한국 사회의 갈등이 뭐 같아요?

이 : 글쎄요? 서로가 다른 관점을 갖고 있더라도 상대를 존중하면서 차분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소통이 좀 부족한 거 아닐까요?
갈등을 상호성장의 기회로 만들 소통 기술 필요해
김 : 맞는 말인데, 조금 더 들어가 바꿔서 말한다면 우리 사회의 갈등은 갈등이 문제가 아니라 갈등을 어떻게 상호 성장의 기회로 만들지에 대한 소통 기술이 없어서예요. 의사소통의 기술로 갈등을 상호 성장의 기회로 만들어야지 물질적으로 이거 줄게 울지 마. 너 일자리 없다고? 내가 해결해 줄게 등, 그냥 일시적인 생존 욕구만 충족시키려 하기 때문에 행복해지지가 않아요.
이 : 그렇군요. 갈등을 당장의 회피로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 아니라 갈등을 성장의 기회로 삼아 궁극적으로 행복한 삶으로 전환시키는 소통의 기술이 훈련되어야겠군요. 제가 20여년 부모교육 강사활동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 소장님께 배워야 할 게 많은 것 같습니다.
한 30여 년을 이렇게 상담소를 이끌어오셨는데 이제 부모 교육 강사나 심리 상담을 하는 후배들에게 꼭 이것만은 지켰으면 좋겠다고 꼬집어 말씀해 주실 것이 있을까요?.
 김 : 우리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요즘의 사회에서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갈등이 생겼을 적에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르면 상대방을 없애버리고 어떡하든지 내 뜻 대로 그냥 밀어부쳐요. 부모-자식도 그렇고 사회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그러니까 갈등을 상호 성장의 기회로 만들 수 있고 그런 방법이나 기술을 연구하고 배울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 지금 한국 사회의 급증하는 고령인구 문제예요. 그 고령자들 중에 60대 70대는 아주 건강해요. 그러니까 급증하는 고령자들이 어떻게 보람 있게 노후를 살 수 있을지? 그리고 또 하나 이제 가족이 단순화되면서 아이가 하나라던가 아이를 낳지 않아서 이제 뭐 형제가 없는 거죠. 어떤 집은 부모하고 아들 딸이 있는데 각자가 오피스텔 하나씩 집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대가족 제도가 무너지는 거예요. 대가족 제도가 무너지면서 내가 요새 유심히 보는데요. 대중식당에서 보면 젓가락질 하나 제대로 하는 청년이 참 보기 어려워요. 뭐냐 테이블 매너 그러니까 그 식탁에서 지켜야 하는 태도도 완전히 무너졌어요. 그냥 지 애들 챙기느라 같이 앉아있는 어른은 안중에도 없어요.
좀 언짢은 얘기이지만, 최근 긍정심리학 창립멤버이면서 대가인 에드디노가 국제세미나에서 한국사회를 진단하면서 GDP가 세계 11위인데 반해 불행감과 자살률이 세계 1위라고, 그 원인을 과도한 일과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라고 지적했어요. 또 고가의 사치품을 좋아하는 사치병을 꼬집었어요. 동석하고 있던 자리여서 “경제적 부가 행복감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사례를 보여준 거로군요!”라며 시니컬한 반응을 보이자 그 다음부터는 더 언급하지 않더라고요. 같은 세미나에서 소련출신의 여성 긍정심리학자는 오년 동안 아프리카의 오지에서부터 에스키먼까지 대상으로 인간의 행복에 절대적 구성조건을 추적조사해서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50%가 유전적인 요인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환경 요인은 10프로 밖에 안 되고, 개인의 통제력이 40% 영향을 미친다고 합디다. 말하자면 개인이 자신의 행복감을 느끼는데 이 40%의 통제력을 어떻게 발휘시켜 내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죠. 그래서 ‘맞다! 이 40%로 60%를 통제하고 관리하면 된다. 그리고 40%라는 개인 능력은 대단한 거다!’
그러니까 환경 요인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이 : 그러면 지금 후배 지도자들이나 그 후배 상담사들한테 주실 말씀이 바로 이 40%의 통제력을 강사자신은 물론이고 나의 내담자나 수강자들이 어떻게 발휘할 것인지를 이끄는 교육에 집중을 해라 이런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군요.

 


 

40%의 개인의 능력이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 통제할 수 있어 ~

 

김 : 그런데 그게요,  굉장히 어려운 것 같은데 그것도 또 굉장히 가능해요.
제 예를 들어보면, 질문자님. 늙으니까 잘 안 들리고 잘 안 보이고 늙어가는 속도하고 적응하는 속도가 안 맞어.  그래서 민망할 때가 있기는 한 데… 그 대신에 잡스러운 일로부터 좀 해방이 되니까 내가 열심히 뭔가 좀 다른 답을 구하고 싶다. 어떻게 하면 좋은 답을 알 수 있을까. 이런 거에 대해서 집중하다보면, 아침에 일어날 때쯤 돼서 내가 옛날 어느 때 어느 책에서 읽었던 그런 내용.. 생각이 나서 그냥 벌떡 일어나서 책을 찾아가지고 펼쳐보면 거의 페이지까지 딱 맞춰. 그래서 내가 요새는 자신에게 뭐라고 그러냐면 ‘니가 마음을 비우고 답을 찾으면 답이 너를 찾아 올거야’ 하고 위로를 해요. 이러한 것이 늙은 다음에 누릴 수 있는 행복이예요. 자연스럽게 나의 통제력이 나를 이끄는거지요.

 

  이어지는 말씀으로는, 현재 가장 염려되는 것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하여 마스크를 쓰고 소통하기에 비언어적 매세지 전달의 어려움.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직접 만날 수가 없는 점. 토마스 고든의 이론이나 선택이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의 관계는 밀접히 만나고 스킨십 등을 통하여 사랑을 확인하면서 소통을 해야 만이 엔돌핀, 세로토닌 등이 샘솟으면서 행복감과 면역력을 증강시켜줄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세월이 너무 길어져서 큰 걱정이다.
또 어린 시절에 양육자의 태도와 환경의 중요성으로 어린 시절 인정, 소속의 욕구와 힘의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억압되어 있다가 성인이 되어서 힘을 갖게 되면 그에 대한 투사로 악한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 사례로 독일의 히틀러와 크로아티아 전 대통령인 티토를 보면 알 수 있다. 더불어 부모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미운사람 생각이 나면 빨리 다른 좋은 생각으로 대치를 해요

이 : 소장님을 모시고 그냥 하루 종일 강의를 들어도 너무 신나고 재밌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90세가 되시도록 정말 정정하게 활동을 하시는 데 특별한 건강 비결이 있을까요. 김 : 바로 남을 도와주고 위해주는 것이 자기를 위하는 길이라는 할머님의 가르침과 또 우리 아버지는 항상 그러셨어요.

“아버지 건강하게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화내지 말고 남을 미워하지 말아야 해”.
“아휴, 아버지 그거 너무 어려워요. 화가 나는데 어떻게 화를 안 내요 그리고 미운 짓만 하는 사람을 어떻게 안 미워해요.”
“니 마음대로 해”
우리 아버지의 답이 너무나 간단하셨어요.

이 : 따님을 완전히 믿으셨군요.

김 : 그렇죠. 니 마음대로 해! 그 선택권이 나에게 있다고 하신거죠. 그런데 이제 이렇게 이 나이가 돼도 꼴 보기 싫고 미운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꼴 보기 싫고 미워도 내 선택이라고 하셨지! 그런데도 그냥 자꾸 떠오르는 거예요. 미운 짓한 사람 꼴 보기 싫은 사람이 떠올라요. 그러면 즉시 다른 선택을 하는 거죠. 그래, 다른 좋은 생각을 떠올리는 거야. 그래서 뭐 이렇게 공개적으로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마는 내가 이제 이게 늙어지면서 많이 외로워지더라고요. 이렇게 가족이 다 떠나고 그러니까 누구를 오랫동안 못 만나면 섭섭하고 막 이래 그러면 이제 나를 섭섭하게 한 사람이 떠오르잖아요. 그러면 떠오르는 거를 신호로 해가지고 그때마다 그를 향한 좋은 기도를 하는 거예요. ‘아 이거는 기도하라’는 신호구나 하면서 기도를 해요.

이 : 그러니까 알아차림을 통하여 긍정심리학에서 얘기하는 생각을 긍정의 상태로 바꾸시니까 그게 건강에 굉장히 도움이 되시는 거군요. 그리고 신체적으로 무슨 운동하시거나 이러는 건 없으세요.

김 : 이제는 먹는 것을 결식하지 않고 과식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기 전과 아침에 깨어나서 간단하게 한 5분이고 10분이고 다리를 올려서 흔들어 줍니다. 이렇게 피가 잘 안 통하고 아래에 피가 잘 안 돌고 그러니까 이렇게 팔 다리 흔들어대는 운동을 자주 하지요. 이제 많이 걷지를 못하니까 가능한 실내 자전거 타는 운동하고 그냥 이렇게 딱 정해놓고 이제 ‘오늘은 하지 말아야겠다가 아니라 오늘도 해야지’ 하면서 하고 있어요.

김인자 소장님은 아침 6시면 카톨릭 미사에 참여한 후 운동을 하고 아침을 먹고 사무실에 출근하신다 한다.

이 : 심리상담연구소에서 만든 포켓용 카드 <행복에 이르는 길>에 말씀하신 절식, 과식의 이야기와 절제 그리고 아침에 거울보고 밝게 세 번 웃기가 있네요.

김 : 그게 말이에요. 어떻게 보면은 바보 같잖아요. 아침에 세수하고 우리 모두 거울 들여다보지 않아요? 거울에 자기 얼굴이 따악 보이면 자기 얼굴을 보고 세 차례 환히 웃어보세요. 기분이 밝아져요. 바로 자신이 행동을 선택했기 때문에 몸 안에서 세라토닌이 생겨요. 그리고 ‘때문에’를 ‘덕분에’로 바꾸는 것입니다.

최고의 지지자인 남편 故 서대석 이사장에게 가장 감사
이 : 인터뷰를 마무리 할 시점이어서 부군과의 인연에 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소장님께서 한국심리상담소와 긍정심리재단을 설립하시고 이끌어 가실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신 가장 큰 지지자는 부군이신 서대석 선생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대석 선생님과의 만남, 그리고 인생과 사업의 동반자이셨던 남편은 어떤 분이셨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김 : 지지 정도가 아니야. 세계적인 유명한 대가들을 내가 찾아가서 직접 만나보니까 아 정말 대가야. 근데 한국에 많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못 만나잖아요. 그러한 얘기를 했더니 뭐 간단하게 그 사람들을 한국에 오게 하면 되지 않소! 하시는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오게 하는데에는 돈이 필요하잖아요. 헌데 경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망설이니까 우리 집 회장은 그냥 해! 하시는 거예요. 처음으로 마틴 셀리그만을 초청해서 연대에서 세미나를 여는데 세계적인 사람을 부르니까 한 8, 900명? 1,000명 가까이 모였어요. 그리고 또 대학원대학교를 한다고 그러다가 같이 하자고 하신 분이 당시에 대학을 줄이고 통폐합을 하던 시절이어서 무서워서 못 하겠다고 포기를 하는 바람에 부지도 마련하고 터를 닦느라 평창동에 400여평의 땅을 팔고 살던 집도 팔고 하였는데 갑자기 중단되는 바람에 그때 굉장한 액수의 돈을 손해 봤거든. 그래서 사람들이 손해 입힌 사람을 고소하라고 막 그랬는데, 고발당한 사람도 법정에 드나들어야 하지만 고발한 사람도 변호사 만나고 법정에 드나들어야 해 하면서 내 팔목을 탁 잡고 “여보 그렇게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아”하시는 거예요. 그대로 포기를 했죠.  사실 지금도 코로나19로 연구소 운영이 어려워졌어요. 어려워졌다는 사실은 인식을 하는데, 어떡하지 이러다가 큰일 나겠네 등 이러한 조바심이 전혀 없어요. 어차피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건데 그냥 의미 있는 일 재밌게 하고 좋은 사람들 만나고 그러면 부자다 이렇게 느껴져요.

몸으로 직접 지역사회교육운동에 참여하신 정주영 회장님

남편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정주영 회장님이 떠오르네.. 정회장님은 누가 무슨 질문을 해도 언제든지 호탕하게 답변을 하셔요. 한 번은 정주영회장님이 경제학자들과의 모임에서
“이제 우리나라도 잘 살 수 있다.”
“경제적으로 잘 살려면 재원, 자원이 필요한데 우리나라는 재원도 없고 자원도 없는데 어떻게 잘 살 수가 있는지 그렇게 믿는 근거가 뭐예요?”
“맞아요. 잘 살게 되려면 재원과 자원이 필요한데 우리나라는 재원도 자원도 부족하죠. 부족합니다. 그런데 세계 재원과 자원은 많습니다. 이제는 전 세계의 재원과 자원을 다 함께 쓸 수 있어요. 그것을 활용하는 게 유능한 인재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그 인재가 되십시오.”

사실 그 때 내가 옆에 있었는데, 뭐라고 대답을 하시려나 조금 걱정이 되었는데 이렇게 명쾌하게 답변을 하시는거야.

  그리고 많은 분들이 아시는 거지만, 88올림픽을 유치할 때 경제인의 대표로 정회장님이 동행했잖아요. 88올림픽을 유치하고 귀국길에 바로 식사할 수 있는 데를 마련하고 김인자교수도 꼭 초청하라고 하셨다고 비서실에서 나한테 연락이 왔어. 신나게 갔죠. 정회장님은 어떤 일을 해내시면 아주 신나게 말하고 싶은데 사실 그 양반이 신나게 얘기하면 신나게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잖아요. 그 많은 행운을 누린 사람이 바로 나야. 그 때도 맞장구를 치면서 신나게 들어드렸어. 각국 대표들을 만나 지지를 요청해야하는데 안 만나줘서 각국 대표 방으로 꽃바구니를 보냈더니 그 사람들이 꽃바구니 보내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당신을 찾아왔대요.
조선소 사업이야기도 아주 유명하죠. 그 과정도 아주 신나게 리얼하게 해주셔서 신나하면서 들어드렸더니 그 다음 해에 첫 배를 완성하여 진수식을 하는데 나를 꼭 참석하라 하신다고 연락이 왔어요. 유부남이 유부녀를 부르는데 그 밤에 혼자 갈 수가 없잖아. 그래서 성심여고에 연락을 해서 교사수녀 두 명과 함께 셋이 내려갔지.
헌데 어느 날은 부인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여기까지 사업을 펼치는 데에 절대적으로 가족의 뒷받침이 필요한데 집사람 같이 몇 달을 집에를 못 가도 잔소리 한 마디 없이 그동안 왜 그렇게 안 들어왔냐고 바가지 긁는 일도 없이 또 일가친척들 일도 전부 맡아서 돌봐주고 난 집사람에게 굉장히 감사해야하는 사람이야.. 하시는거지, 요새 생각을 해보면 그런 대가들도 상담을 받고 싶었어. 그렇겠지 그게 상담이었던 거야.
그리고 울산에 조선소, 자동차 공장 등 현대공단에 많은 사람이 근무를 하게 되면서 가족하고 떨어져 집에를 못가고 현지에서 머물다 보니까 가정불화가 많이 생기는거예요. 그런 걱정을 하시기에, “간단해요. 회장님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만들면 돼요. 성당도 짓고 교회도 짓고..”하였더니 “그래? 그럼 지으면 되지 뭐!”
이처럼 정회장님은 누가 좋은 아이디어를 내면 가능한 이 아이디어를 차용하여 실행을 하시는 분이었어요. 어느 날, 정회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하시는 그 분의 의중을 읽고, 지방에 종합병원 다섯 군데를 짓도록 의견을 낸 일. 병원이 들어서면서 그 지역민들이 고마워서 병원관계자들에게 무, 배추를 나누고 병원에 와서 김장도 해주고, 본인에게도 가져다주어서 서울까지 배추를 싣고 왔던 경험 등. 당시에는 벌판이었던 송파구에 병원을 지으면서 하신 말씀 등을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인 양 신나게 들려 주셨습니다.

이 : 남편에 관해 말씀하시다가 자연스럽게 정주영회장님 말씀으로 넘어가시네요. 아마도 두 회장님의 면모가 많이 비슷하신가 봐요.

김 : 우리 회장님(부군)과 정회장님의 호탕함이 많이 비슷합니다. 내게는 존경하는 세 남자가 있어요, 친정 아버지, 내 남편 그리고 정주영회장님이예요.

이 : 정회장님과의 많은 추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가시나 봐요. 밤 새 들어도 할 이야기가 넘치실 것 같습니다. 언제 또 한 번 길게 이야기 나눌 기회를 갖기로 하고, 오늘은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세상은 글로벌화 되었잖아요. 이런 시대에 맞춰서 우리가 가진 재능으로 세상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또 어떠한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얘기 좀 해주세요.

김 : 인류는 굉장히 개인적으로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고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몇 천 년을 두고 일관되게  모든 사람은 다 개인의 건강과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서 산다는 거예요. 행복은 절대로 혼자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이웃하고 함께 함으로써 가능한 거예요. 이웃하고 갈등이 생겼을 때 이웃을 없애는 것이 갈등 해결이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분위기에서 갈등을 지혜롭게 활용하면서 같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하는 것이지요. 우리 이 지역사회교육운동이 그냥 단순하게 학교 중심으로 하는 학부모교육이 아니라 그 지역사회 전체가 커뮤니티를 형성하여 화해하고 협동할 수 있도록 이끈다면 이 운동의 발상지 미국 프린트 시와 같은 멋진 공동체를 만들게 되겠지요.
이 지역사회교육윤동의 시발점이 된 프린트시의 기록영화 를 함께 시청한 이연숙(전 국회의원)선생과 조그만 방에서 오재경 선생님 정준 선생님 그리고 나 이렇게 처음에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머리를 맞대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내가 노래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렇게 지역사회 전체가 학교가 되어야 하고 배움터라야 합니다. 그래서 각자가 원하는 것이 달라서 갈등이 생겼을 때 그 갈등을 성장의 기회로 활용해서 공동 이익을 추구하는 그러한 사회로 성장해야죠. 이러한 지역사회교육활동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평화구현에 밑거름이 될 수 있고 우리가 바로 그러한 가치를 일구어내는 역군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면 좋겠어요. 이 단체가 이렇듯 평범한 사람들이 아주 순수하고 높은 뜻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을 지원해주고 또 이 뜻을 기리며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행운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이 좋은 활동에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로 감사했고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겠습니다.

이 : 예 감사합니다. 우리가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또 갈등이라는 것도 이웃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고, 그걸 극복하면서 어떠한 해답도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웃을 소중히 여기고 그 관계 안에서 소통을 잘하면서 갈등을 발전의 기회로 삼는다면 우리는 나와 내 가족 내 이웃뿐 아니라 그게 퍼져서 사회, 그야말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귀한 말씀으로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언제고 다시 한 번 소장님을 모시고 1박을 하면서 빙 둘러앉아 두런두런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 봅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분을 잃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뜻이죠. 오늘 그런 시간이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90세의 노교수님을 모시고 그 분의 인생 여정, 철학 등을 들을 수 있었고, 또 한국지역사회교육운동과 관련된 초창기의 여러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뵈올 날을 꿈꿔보며 오늘 인터뷰를 마칠까 합니다. 카메라를 보시고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 : 아무튼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놀라운 것은 다른 기업가들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을 아산 정주영회장님께서는 50여년 전에 우리 사회에 지역사회교육운동의 씨앗을 뿌리신거지요. 지금은 평생학습시대가 되어 정부 주도로 이러한 활동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만 그 당시로는 어느 누구도 생각지도 않던 일이었죠. 이는 대단히 훌륭한 업적이십니다. 우리 한국지역사회교육재단은 故 정주영회장님의 뜻을 받들어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의식의 건강과 더불어 우리 사회가 행복해지도록 다양한 활동을 계획하고 지원함으로서 지역사회를 넘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다는 것에 대한 큰 자부심과 자신감 이런 것을 다지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이 : 감사합니다. 오늘 장시간 아주 귀한 말씀해 주시고 지역사회교육운동의 대선배님으로 저희에게 좋은 귀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자리를 빛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리구요. 건강을 기원하면서 <제 9회 아산지역사회교육상>을 받으신 것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 1시간 30분가량 인터뷰가 진행되었습니다. 김인자소장님의 수고와 열정을 고스란히 전하고 또한 남기고자 가능한 많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내용에는 왜곡됨이 없이 매끄러운 전달을 위하여 녹취한 내용을 약간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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